실패한 인생도 더불어 빛나는 세상이기를!

요즘은 나누고 싶은 글들이 너무 많다. 어제 ‘대유공간.이화서원’ 카톡방에 올라온 글이 있어서 이 공간에 공유하고자 한다. 글을 읽으면서 울컥했다. 절절히 공감되는 내용이라 그랬다. 내가 살았던 시절, 나도 고민했던 내용들… 며칠간 여러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누가 올리신 글이다. 서로 서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해보자는 의미에서 올리신 것 같다. 시작은 카톡방 멤버 한 분이 자신의 정치적 생각을 감정을 담아 약간은 거친 언어로 피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 왜 아침부터 카톡방의 회원들이 나가고 싶을 만큼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담긴 글을 아침 일찍부터 올리십니까? 이런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폭력적입니다! ” 라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부터 그 분이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며 옹호하는 사람들, 심지어 카톡방에서 감정을 배설하지 말고 스스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의견들까지… 나는 어느 쪽?일까 생각하며 며칠 동안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쉽지 않았다. 나도 경험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여러 생각들이 오고 가기도 했고.

작년부터 내내 지인들 모임에서 ” 도대체 이 나라가 미친거 아냐? 어떻게 손바닥에 왕(王) 자를 새긴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지? 지금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거지? ” 라고 내가 물어보면 어떤이는 이렇게 응대했다. 소위 운동권을 자처하며 민주 열사라고 했던 인간들이 도대체 한 게 뭔데? 180석에 전국이 파란색으로 뒤덮였던 그 좋은 시절에 뭘 했는데, 개혁을 했어? 뭐가 더 나은데? 똑같은 쓰레기들이야! 그 좋은 기회를 날리다니!… 사실 이런 식의 논쟁은 답도 없고 감정만 상하고 그렇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린 사람들의 공이 별 게 아닌것으로 취급당하는 것도 속상하고 화가 났다. 민주주의가 너무나도 지나친? 나라에 살고 있다보니 민주주의의 단점만 남아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름 설득을 해보기도 하지만 속상하고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들은 손에 피하나 안묻히고 숟가락 얹어져 지금껏 편히 살고 있는 주제에… 어떨 땐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는 것도 꾹꾹 참고.

사실 민주주의의 한계나 모순점들이 얼마나 심각한지 우린 모두 안다. 겨우 1표 이기면 이긴거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한 표를 더 가졌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마는 상황이 정말 정말 싫다. 나 또한 그런 식의 투표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적이 많다. 내가 속해있는 협회에서 회의를 할 때마다 내가 생각할 때 전혀 아닌 방향으로 상정된 안건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투표로 결정되는데 이게 오랜세월 동안 늘 문제가 되었다. 나만 빼고 찬성표를 던진 결과에 대해 계속 반대하며 저항하던 나는, 이미 끝난 결과에 대해 뒤에 가서 딴 말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혀서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건 아닌데.. 하는 책임감을 갖고 힘들어 하면서도 부딪쳐 해결하고 싶었는데… 문제는 대다수의 협회 회원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문제 의식도 없거니와 총회나 회의가 길어지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니 내가 무슨 항변을 하고 그들을 위해 대변해야 할 수 있을까? 나와 함께 일하는 샘 한 분은, ” 정치를 하세요! 부딪치지 마시구요.”. 지난 10년 동안 지켜본 결과 요즘엔 내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협회는 발전이 아니라 후퇴를 했고, 회원들을 위한 협회가 아닌 임원들을 위한 협회로 전락된지 오래 되었음도 그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는 10여년동안 정말 많은 회원들이 떠났다. 이젠 당당히 묻고 싶다. 지난 10여년간 무슨 노력을 했으며 얼마나 성장했는지??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암튼 내가 한 달전에 주인장의 초대로 들어간 이 카톡방은 어제 부로 둘로 나뉘어졌다. 주인장이 새로 다른 카톡방을 만듦으로써. 4년동안 400여명이 지냈던 카톡방이 둘로 쪼개지다니. 이토록 우리는 함께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이 결과가 최선이었을까? 어제의 일이 있기 전, 엊그제 카톡방에 올라온 아래의 글은 조금 수선스러웠던 카톡방을 잠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잘 해결되는 줄로 알았다.

내가 이곳에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좀 치열하게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져보면 좋겠다. 너무 빠르게 사는데 익숙해져서 잠시라도 생각할 틈도 없이 앞으로만 달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말이다. 무더운 여름은 이제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면서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이제 정말 사유의 계절이 돌아오는 것이다. 야~~~~ 반갑다 ,가을!!

‘ 실패한 인생’도 더불어 빛나는 세상이기를! 김석봉 선생님의 < 이별의 변주곡 – 나의 해방일지 > 중에서

“대표님. 우리 사무국 식구들 대표님 댁에 엠티 가려고요. 괜찮지요?”

여름에 접어들 무렵 한 지역 환경단체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 하마 잊힐 때도 되었건만 아직 이런 전화를 받다니.

열다섯 해 전 이 산골로 들어와 허름한 농가를 손질해 민박이랍시고 시작하자 이런저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종종 우리 민박집을 찾아왔었다. 사무국 상근활동가와 간부임원들이 수련회랍시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환경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청춘을 보낸 경력 때문일 것이다.

처음엔 한 달에 서너 팀은 우리 집을 다녀가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차차 줄어들더니 요즘은 거의 뜸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주는 이들이 있다. 한 시절 함께 활동했던 동료나 후배활동가가 아직도 현장에 있다 보니 인사치레도 할 겸 찾는 것이리라. 이유야 어떻든 그런 만남이 반갑고 고마워서 함께 모여앉아 밤늦도록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허접한 무용담을 술상 위에 올려놓고 활동가들은 한동안 방에 틀어박혔다. 전반기 사업 평가와 후반기 사업 계획을 이야기 하겠지. 그리고 회원 증대, 사무국재정안정화 뭐 이런 따위의 주제가 오르내리겠지. 오래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회비수입이 늘고 어떤 사업으로 재정을 확보할까 궁리하고 있겠지. 그러다 몇 줄 희망찬 미래를 기록하고 이 식탁으로 돌아와 술을 마시겠지.

어둠이 내릴 즈음 활동가들이 방에서 나왔다. 수련회를 마친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돼지고기수육을 안주로 술상을 차렸다. 기다렸다는 듯 빙 둘러앉았고 술잔이 돌았다. 먼 옛날 함께 활동해 눈에 익은 사무국장이 나를 자리로 끌어들였다.

“대표님 옛날엔 대단하셨어. 댐 반대운동 한다고 전국 댐 예정지를 자전거 타고 다니며 일인시위를 하셨거든.”

사무국장이 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다른 젊은 활동가들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늙어버린 선배운동가를 바라보며 그들은 자신의 미래조차 불안불안 하다는 생각에 빠졌을 거였다.

“아, 그때 대표님 몇 박 며칠 총 몇 키로 다니셨던가요?”

“응. 열엿새 걸렸지. 천칠백 키로 타고.”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우리 후배들도 듣게요.”

“뭘 그런 걸. 오래된 이야긴데 들어 뭐한다고.”

허접한 무용담이 술상 위를 맴돌고 있었다. 지역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대화였다.

“그래서 이기셨어요?”

한 젊은 활동가가 무용담을 파고들었다. 말 속엔 가시가 돋쳤고 눈빛엔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당시 정부는 전국적으로 12개의 댐 건설계획을 발표했고, 벌써 4개의 댐이 완공된 상태였다.

“대표님. 그때 대표님이 결사반대해 여기 지리산 댐은 백지화 된 거잖아요.”

분위기를 알아차린 사무국장이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슬픈 판정을 내리며

“우리 대표님은 지역 활동가출신 최초의 전국대표 하셨잖아. 역대 최연소 대표시고. 이명박 정권 4대강사업 할 때 대표를 맡으셨지.”

“환경운동가로 성공한 분이셔. 환경단체 전국대표도 하시고 녹색당 첫 운영위원장으로도 선출되셨어. 환경운동가로 최고의 직책을 두루 섭렵하신 거잖아.”

“우리가 내일 걷게 될 지리산둘레길 사업도 하셨지. 그렇죠? 대표님께서 초창기 둘레길 사업에 책임자로 일하셨잖아요.”

대개 그랬다. 누구든 나를 소개할 때 내 앞에 걸어준 수식어는 주로 이랬다. 그러면서 다들 내 인생을 ‘성공한 인생의 표본’으로 정리해주곤 했다. 손사래를 치고 계면쩍어하면서도 나 또한 그런 소개를 크게 마다하지 않았다.

그처럼 나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성공한 인생’이라는 입간판을 걸어놓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불에 덴 듯 벗어 던져버린 상근활동가의 삶, 미련 없이 떠나 와버린 도시였지만 나의 존재감을 통째 묻어버릴 용기는 아직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지난 해 겨울 석 달 열흘쯤 방구석에 틀어박혀 소위 자전소설이라는 것을 썼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내 삶을 기록해두고 싶어서였다. 살아오면서 전해들은 내 어머니 아버지의 삶에서부터 한 시절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등짐을 부려놓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농부의 삶에 젖어들기까지의 기록이었다.

차마 끄집어내기 부끄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오르막 내리막 굽이굽이 휘돌아 한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자 이게 성공한 삶인지 실패한 삶인지 결정해야할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실패한 인생’이라는 슬픈 판정을 내려야 했다.

열심히 살았으나 정작 손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시절 나를 장식하던 호칭과 명예는 늙어버린 나무 등걸에 대롱대롱 매달려 부서져가는 매미의 허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세상 바라 바친 청춘의 세월은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채 그렇게 흩어져버린 상태였다.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그동안 수많은 희생이 따랐어도 이 세상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모호하고, 전쟁위기는 더 높아지고, 인권은 후퇴했고, 차별은 심화되었다. 여전히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자살률을 가진 나라. 험악한 빈부격차와 불가능한 계층이동사회. 최저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공사장에서 떨어지고 기계에 끼어 죽는다. 국토는 거덜 나고, 핵발전소는 확장되고, 기록적인 폭우와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도로가 넓어지고 아파트 평수가 늘어났을 뿐 별반 나아진 것 없는 세상이다.

소위 민주정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투사들이 선출직으로 임명직으로 나서 정책을 내고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민주항쟁을 이끌던 지도부가 국회의원이 되고 더러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열혈 노동운동가가 노동관련 정부위원장을 맡았고, 노련한 농민운동가가 농업관련 정부위원장을 맡았다. 환경운동가가 환경부장관이 되었다. 여성운동가가 여성행정을 총괄했고, 시인이 문화행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을 탐하고 황금을 쫓아다닌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학원 시간표를 아이들 방에 걸어두었고, 더 큰 자동차로 바꾸었고, 서울로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댔다.

마트가 평수를 넓혔을 뿐 여전히 나아진 것 없는 세상이다.

성전은 더 웅장해졌고, 교회 첨탑은 더 높다랗게 솟구쳤고, 절집은 면적을 더 넓혔다. 그러나 거리는 칼부림으로 선혈이 낭자하다. 뒤쳐진 인생, 외톨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저항이 우리 모두의 삶을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정부는 오로지 경제성장율 높이기에 급급하고 국민은 각자도생의 길목에서 아귀다툼을 벌여야 한다.

환경단체에서 일한 나는 어떠했던가. 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지 못했고 정책으로 미래를 담보하지 못했다. 새만금도 막혔고, 4대강사업도 척척 진행되었다. 골프장으로 국토가 누더기로 변했지만 골프장은 아름다웠고, 골프사업은 흥했다. 그때마다 나는 국민의 의식을 탓하는 볼멘소리만 내놓았다.

댐 건설을 반대하면서도 목욕탕 할인티켓을 한 묶음씩 샀고, 숲을 지키려했으면서 고깃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고속철을 반대했으면서도 가장 맹렬한 고속철도이용자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정부보조금과 기업기부금을 합리화하며 조직의 몸집을 부풀렸다. 세상 사람들이 ‘정의’라는 가치를 쓰레기통에 쳐 넣는 줄도 모르면서 앞만 바라보며 나아갔다.

이 모습을 세상에 남긴 내 인생은 실패작이 분명했다. 마침내 인생의 종착지에서, ” 대표님, 후배 활동가 들에게 희망 가지라는 뜻에서 한 말씀 해주셔야지요.” 몇 순 배 술잔이 돌자 사무국장이 불콰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혔다.

모여 앉은 활동가들이 나를 향해 손뼉을 치며 연호했다. 이제는 멀리 떠나 와버린 한 늙은이에 보내는 온정이거나 소위 ‘성공한 인생’에 대한 기대에서일 것이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이 세상에 건져낼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긴 있을까. 젊으나 젊은 시절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나섰으면서 끝내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 지은 내가 저 풋풋한 청춘들께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다들 나를 보고 성공한 인생이라 하더라고. 세상은 더 나빠졌는데 성공은 무슨 성공.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지. 다들 그러더라고. 그만큼이라도 했으니 이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치하도 해쌓지만 세상을 바로보라고.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말이지. 이처럼 황금과 총칼이 지배하는 흉한 세상은 없을 거야. 내 인생의 종착지가 이 꼴인데 어찌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겠어?”

술기운을 억누르며 정색했다. 한순간 들떴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동의하든 부정하든 내 마음은 한층 홀가분했다. 무겁고 두꺼운 갑옷 같은 것을 다 벗어버린 느낌이었다. 홀로 해방감에 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정 그럴까. 내가 찍어둔 세상의 발자국들은 정녕 무용한 것일까. 실패한 인생이라는 고백과 참회로 얻은 해방감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세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저지하는 사람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 도시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새를 불러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습지를 파괴하고 산지를 허무는 개발계획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사람들, 바닥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희망이 되고자하는 사람들, 성공과 실패로 갈라놓을 수 없는 절대가치의 행동에 모든 인생을 맡겨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결코 신기루가 아니다. 이 저급한 삶의 문명에서 벗어나 함께 가꿔야할 세상인 것이다.’ 실패한 인생’도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찾아보니 김석봉 선생님이 쓰신 글이 있다. 좋은 글들을 많이 연재해주신 듯하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찾아보세요~~^^

” 지난 1월16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 주도 빠짐없이 매주 월요일 나의 자전소설 <이별의 변주곡 -나의 해방일지->를 페북에 연재해 왔다.
‘제1부 두 여자,’ ‘제2부 천형(天刑)의 날들’, ‘제3부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집안이 형성되고 내가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세상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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